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 마는 꽃은 아쉽다 하지 않는다. 다만 짙어지는 봄의 몫이라 할 뿐. 번뇌는 다만 사람의 몫인 줄, 꽃을 보니 알겠다.  설리춘색雪裏春色이라고, 마지막 남은 겨울 기운 속 봄빛인지 미세먼지인지 난분분하던 3월, 목적지는 경북 구미였다. 쑤욱, 하고 올라온 아득한 3월 향기를 코오, 하고 맡으며 도착한 구미시 옥계동. 논이며 밭이던 땅을 다져 개발한 택지 지구 한가운데 옥계성당이 자리하고, 그 바로 옆에 우리 목적지 어울링 아뜰리에가 있었다. 이 집 2층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성모상이 지척에 보이는, 그 은혜로운 풍경이 우선 좋았다. 평소 말을 걸지 않으면 카메라 앞에서도 선정 삼매禪定三昧에 들 것 같은 사진작가 박찬우도 그 풍경 앞에선 잠시 움쩍했다. 듬성듬성 박힌 논밭과 나대지 사이, 흰 벽과 아치로 둘러싸인 어울링 아뜰리에는 이 가족의 살림집이자 플라워 디렉터 정다윤 씨의 작업실이다. ‘어울리다’를 어간으로 삼아 정다윤 씨가 만든 조어 ‘어울링’에서 짐작하듯 조화롭게 살고 싶은 사람과 그의 가족이 이곳에 산다. 그리고 옥계동은 정다윤 씨의 고향이다.  

집 짓기! 우리의 궤도 일탈


“대학 때문에 대구로 가고, 꽃을 배우러 서울로 가면서 한 20년 떠나 있다가 40대 초반에 돌아온 거죠. 낮엔 온통 논밭이고, 밤엔 온통 깜깜한 정적인 동네였는데 신도시로 개발됐고, 부모님이 먼저 돌아왔어요. 당시 우리 가족은 대구에 집과 로드 숍을 두었는데, 남편이 세종시의 회사로 이직하며 주말부부 생활을 시작했죠. 아이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고요. 평일엔 남편 없이 일과 육아를 해내야 한다는 것이었죠. 집을 지을 시기가 이때다 싶었어요.”  사람이라는 생물의 선악과 미추를 모두 경험하고야 만다는 집 짓기를 삶의 대단한 변곡점을 맞은 시기에 결심했다니, 이 무슨 곡절인가.  “기왕 일과 육아를 동시에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 두 가지를 해결할 복합적 공간을 건축해보자 싶었죠. 코로나19시대여서 오히려 쉽사리 결심했어요. 차라리 이럴 때 다른 형태로 좀 살아보자, 우리 부부의 가치관을 실현하는 것에 용기를 좀 내보자 했죠. 20년 넘게 꽃을 만지며 제 색깔을 드러내는 것에 맹목적으로 매달려왔는데, 경쟁이 과열된 그곳에서 제가 생각보다 많이 지쳤더라고요. 부모님 집이 3분 거리로 지척인 동네, 저녁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조용한동네에서 살고 싶어졌어요.” 인간은 탈피나 변신이 가능한 동물이 아니다. 단지 자신의 궤도에서 일탈함으로써 그와 비슷한 효과를 얻는다. 

우린 팬데믹이란 ‘전 인류적 일단 멈춤’을 겪었고, 그 속에서 각자 나름대로 궤도 일탈-탈피나 변신하는 법을 익혔다. 정다윤 씨는 집 짓기로 그 궤도 일탈을 감행한 것이다.  “대구든 구미든 남편과는 주말부부로 살 수밖에 없고, 제 수업에도 어차피 전국구 수강생이 오기 때문에 대구나 구미나 도긴개긴이었죠. 홍보도 주로 SNS를 통하니 큰 도시의 로드 숍이 굳이 필요 없었고요. 그래서 결론은 작업실겸 집을 짓자, 꽝꽝광! 결정한 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자문을 구하고, 우리 부부의 취향을 이해해줄 건축가를 찾아내고…. 일사천리로 추진했어요.”  주택 전문 잡지에서 찾아낸 건축가 김건철 소장(스마트 건축)에게 설계를 의뢰하며 요구한 건 대략 이 정도였다. “일과 육아가 한 공간에서 공존하도록 최대한 공간을 융합해달라, 주말에라도 가족이 함께 쉬고 놀고 공부할 수 있도록 가족 서재와 정원을 신경 써달라.” 완성된 집은 아담한 마당을 살림집과 작업실이 ㄱ자로 나눠 쓰는 구조다. 작업실은 찻길에 면하고, 살림집은 아치형 대문 너머 쑥 들어가있다. 그리고 ‘이 방 창엔 산수유나무, 이 방 창엔 단풍나무’식으로 모든 방의 창밖으로 나무가 보인다. 무엇보다 한 점 군더더기 없는 단정미. 2층 복도 서가의 책이 죄다 허연 책배(제본된 책의 속장 앞쪽의 재단 부분)를 드러낸 채 꽂혀 있을 정도다. “무조건 형태상 아름다운 것, 통일된 것이 좋거든요. 변화를 주려면 강조점을 확실히 해야 하고요. 다 읽은 남편과 제 책인데, 컬러 톤도 주제도 강조할 만한 게 없어서 그냥 뒤집어 꽂았어요.” 이 말끔한 성정은 집 안 세간을 부릴 때도 매한가지다. 아홉 살 윤태의 방조차 쇼룸처럼 물건들이 일렬종대로 서 있다. 놀라운 건 그 또래 아이들은 저지레가 일상인 법인데, 윤태조차 별명이 ‘선비’라는 것.  

Life Color를 찾아내는 일

 

정다윤 씨는 화훼장식학으로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독일·영국·벨기에·프랑스 등을 돌며 공부한 정통파 플로리스트다(독일 플라워-디자이너 플라워 아트 인터내셔널을 획득했다). 오로지 플라워 관련 피드로 팔로워 12만 명을 넘어선 인플루언서이자 상하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지에서 대면 수업과 온라인 수업 요청이 쇄도하는 인기 강사다. “딸이니까 평생 예쁜 것 보고 살라”는 뜻으로 어머니가 권유한 꽃일이 이제 20여 년째다. 그가 선보이는 꽃은 꺼질 듯 황홀한 한 떨기 정적보다는 별 무리처럼 뒤섞인 생명에 가깝다. 독일의 건축적 플라워 스타일을 띠기도 한다.  “독일에서 다니던 플라워 스쿨이 산속에 있었는데, 선생님들이 하루 한 시간씩 산을 헤매며 그저 자연을 관찰하는 시간을 주셨어요. 정답을 가르쳐주는 대신 주제를 던져주고, 스스로 관찰하고, 생각하고, 표현한 후 프레젠테이션하게 했죠. 그 가르침이 제 플라워 디자인에 고스란히 자리 잡았어요. 어울링 아뜰리에의 브랜드 슬로건이 ‘Life Color Findation’(정다윤 씨가 Find와 Foundation을 조합해 만든 단어)’인데요, 그 산중 꽃들이 각각 다른 빛깔을 지니듯 사람도 각자 다른 삶의 빛깔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 빛깔을 자기 삶에서 잘 표현해내는 게 그 사람에게 주어진 미션이겠고요. Life Color Findation처럼 꽃도 고유의 빛깔을 찾아내고, 어우러지게 하고, 그리하여 그 빛깔을 완성해내는 것, 이게 플라워 디렉터로서 제 일이겠지요.” 자연의 섭리 속에선 정원 꽃과 들꽃이 따로 있지 않다. 작약은 흐드러진 대로, 제비꽃은 소박한 대로, 망태꽃은 수줍음 자체로 우주만큼 경이롭다. 어울링 아뜰리에가 만드는 꽃에서 이를 본다. 각각 본래 지닌 색깔, ‘Life Color’를 찾아내주는 일이 먼저다. 설치 예술에 가까운 플라워 디자인을 위해 그는 작업실 중심에 천장고가 높은 스튜디오를 두었다. SNS용 사진 촬영 장소이기도 해서 안개 낀 몽환적 느낌을 내려고 유럽 미장(광물 성분으로 만든 마이크로시멘트를 이용한 시공법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질감과 컬러가 

특징이다)으로 시공했다. 주로 웨딩, 연회, 기업 행사 등 규모가 큰 플라워 디렉팅을 진행하는 작업 특성상 이 스튜디오 공간은 무대처럼 쓴다. 부드러운 곡선미를 택한 것도 같은 이유다. 스튜디오 옆으로는 상담과 꽃 컨디셔닝 등을 하는 별도 공간이 자리한다. 이곳도 벽 마감을 유럽 미장으로 처리해 몽환적 꽃 작업의 백그라운드가 되고 있다. 

꽃이 지는 건 다만 짙어지는 봄의 몫


30대 아이유가 부르는 ‘개여울’과 70대 정미조가 부르는 ‘개여울’이 다르듯 인생은 굽이마다 그 맛이 죄 다르다. 이제 인생이 쓸쓸한 단맛이라는 걸 알게 된 40대 초반의 부부, 그들은 인생의 변곡점에 선택한 집 짓기에 어떤 중간평가를 내릴까. 

“그동안 자신의 가치를 찾아 실현해가는 삶이었다면, 2021년을 전후해 삶의 조화가 필요한 시점이었죠. 그래서 저처럼 꽃을 통해 꿈을 찾아가는 사람들과 함께하려고 로드 숍을 작업실로 바꿨어요. 부부가, 아이와 엄마 아빠가 각자 삶 속에서 길을 찾아가다 다시 모이면 더 깊게 눈빛을 나누려고 살림집을 그렇게 지었고요. 전에 아파트에서 살땐 집에서 쉰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별로 없어요. 하지만 이 집에선 좀 달라요. 에너지를 한껏 채운 후 남편은 세종시로, 저는 일터로, 아이는 학교로 흩어지고, 주말에 또 모여요. 그게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이어지고요.”  꽃일 하는 사람이니 다시 꽃 이야기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 마는 꽃은 아쉽다 하지 않는다. 다만 짙어지는 봄의 몫이라 할 뿐. 변화 앞에서 번뇌하는 건 오직 사람의 몫이다. 이들은 이제 그 번뇌도 기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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